나라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기원하는 재인(才人) 계통의 춤으로, 경기무악 장단과 발놀음의 기교가 돋보이는 춤
태평무는 일제강점기 서울과 경기지역의 재인들이 집대성(集大成)하여 연행한 전통춤이다. 조선시대 왕ㆍ왕비ㆍ문무백관의 배역을 설정하여 격조 있고 장중하며, 재액을 물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기무악(京畿巫樂)의 다채로운 장단을 활용한 발 놀음의 기교가 돋보이는 춤이다. 김인호(金仁浩, 1850?~1930?)와 한성준(韓成俊, 1874-1941) 계통의 춤이 전승되고 있으며,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가무악희(歌舞樂戱)가 융합된 줄타기, 탈놀이 등의 연행 원리가 녹아 있어 입체적이고 기법이 명확하다.
태평무는 일제강점기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던 재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김인호-이동안(李東安, 1892~1940), 한성준-강선영(姜善泳 1925~2016), 한성준-한영숙(韓英淑, 1920~1989)의 계보로 이어지는 세 종류의 춤이 전승되고 있다.
태평무가 언제 성립되었는지 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문 사료(史料)로 볼 때 1938년 전에 성립된 것으로 가늠된다.
조선일보 1938년 6월 19일자 기사는 조광회(朝光會)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고전무용대회(古典舞踊大會)〉에 참가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연행 종목과 출연자 명단을 보도하였다. 당시 연행 종목은 〈승무〉ㆍ〈단가무〉ㆍ〈검무〉ㆍ〈한량무〉ㆍ〈신선음악〉ㆍ〈상좌무〉ㆍ〈살풀이춤〉ㆍ〈사자무〉ㆍ태평무ㆍ〈학무>ㆍ〈급제무>ㆍ〈사호락무>이다. 태평무는 이선(이강선)과 장홍심(1914~1994)이 2인무로 왕과 왕비의 역할을 맡아 연행하였다. 같은 해 6월 23일 〈고전무용대회〉에서는 이선과 장홍심이 2인 태평무를 추었다. 1939년 2~3월에 이루어진 남선순업공연(南鮮巡業公演)에서도 태평무가 연행되었으나 출연자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940년 2월 27일 〈도동기념공연〉에는 강춘자(강선영)와 한영숙이 2인 태평무를 추었다. 강선영의 고증에 의하면 2인 태평무는 터벌림 장단에 왕과 왕비가 함께 춤추다가 왕이 의자에 앉은 이후부터는 왕비가 겉옷을 벗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원삼(圓衫)과 한삼(汗衫)을 탈복(脫服)하여 춤추는 태평무의 양식(樣式)이 이 시기부터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태평무는 1인이 추는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태평무는 대부분의 민속춤과 같이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전승 방식으로 사사되어 1인 양식이 언제부터 갖추어졌는지 정확한 시기를 알기 어렵다. 다만 1982년 민속무용 학자 정병호(1927~2011)와 신무용가 최현 (1929~2002)이 이동안을 조사하여 문화재관리국이 발행한 무형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無形文化財指定調査報告書) 제149호 『태평무와 발탈』에 1인 태평무가 기록되어 있어 이때 이미 1인 태평무가 학술적으로 논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재인 광대 김인호-이동안으로 이어지는 태평무는 관복(冠服)에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어 입은 원님 1인의 홑춤의 형태이다. 이동안은 이 태평무에 대해서 원님들이 그 해의 풍년(豐年)을 축복하는 뜻에서 관가(官家)나 궁(宮)에서 추어 온 것이라 고증하였다. 한편, 한성준류 태평무는 1988년 정병호가 강선영을 조사하여 저술한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 제181호에 기록되었다.
한성준-강선영 계보의 태평무는 왕과 왕비의 복식(服飾)을 입고 추는 1인 춤이다. 강선영류 태평무가 1988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처음 지정되었고, 강선영의 타계 후 2019년 11월 이현자(李賢子, 1936~2020), 이명자(李明子, 1942~), 양성옥(梁性玉, 1949~)이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2019년에는 한영숙류 태평무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박재희(朴再姬, 1950~)가 한영숙류 태평무의 최초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현재 세 유파의 태평무는 후학들에 의해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
○ 내용 태평무는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태평에 대한 염원을 무속적 세계관으로 풀어낸 춤이다. 특히 경기무악의 다양한 장단을 활용하여 지면(地面)을 밟아주는 발 놀음 춤은 재액(災厄)을 누르고 복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 구조 태평무는 경기도 남부굿의 의례와 장단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청신(請神)에서 오신(娛神), 축원(祝願), 송신(送神)으로 진행되는 의례(儀禮)의 구조는 공연예술의 서사(徐事)로 표현되고, 춤은 무악 장단의 변화에 따라 전개된다. 무용수는 궁중복식을 착용하고 우아하고 격식있는 자태를 보여준다. 강선영류의 태평무는 낙궁장단에 왕비가 입장하여 터벌림장단과 터벌림몰이장단까지 한삼(汗衫)춤을 춘다. 한삼춤은 느린 장단에서는 장중하게, 점차 몰아치는 장단에서는 유연하고 섬세하게 변화된다. 왕비가 원삼(圓衫)과 한삼을 벗어 상궁에게 전달하고 나면 춤의 분위기가 급전환된다. 올림채-올림채몰이-넘김채-발뻐드래 장단으로 이어지는 동안 치마와 당의만을 착용한 채 자유로운 발 밟이춤을 춘다. 점차 흥겹고 역동적인 발 기교를 통해 진취적인 기상이 표현된다. 도살풀이-도살풀이몰이-터벌림장단으로 이어지며 춤은 대미를 장식한다. 한영숙류 태평무도 장단의 변화에 따라 춤이 전개되지만 세부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초반부 원삼을 입고 낙궁 장단에서 입장하던 강선영류와 달리, 당의와 치마만을 입은 채 가야금 연주로 춤이 시작되고, 왕비는 위엄을 보이기보다는 단아하고 우아한 여성적 자태로 외유내강의 심성을 표현한다. 푸살-터벌림-봉등채장단으로 구성된 〈새가락별곡〉 뒤에 타악 중심의 터벌림장단이 이어지면서 끝맺음이 명확하고 단호한 춤으로 왕비의 절도와 위엄을 표현한다. 올림채-올림채몰이-넘김채-천둥채-겹마치기-발뻐드레로 점차 몰아치는 장단에서는 절제미와 흥이 교차되는 발 놀음으로 밟이춤을 춘다. 도살풀이장단으로 넘어가면 발 놀음 보다는 묵직한 팔 동작으로 내면의 인고를 표현한다. 도살풀이에 이어서 모리-발뻐드레-자진굿거리의 장단에서는 다시 한 번 신명을 일으키고 여운을 남기며 춤을 마친다. 이동안류의 태평무는 흰 바탕에 붉은 단을 댄 한삼을 뿌려 흉액(胸液)을 몰아내고, 발 밟이춤으로 방수를 밟아 평안을 기원하는 춤의 의미를 담아낸다. 도입부에서는 낙궁장단에 맞춰 입장하고 부정놀이장단에서 관객에게 인사를 한다. 전개부는 터벌림-엇모리장단으로 이어지는데, 터벌림장단의 한삼춤은 맺음이 분명하여 절도가 있고 직선적 공간을 사용한다면, 엇모리장단의 한삼춤은 맺고·풀고·어르는 기법을 사용하여 긴장을 풀고 흥을 돋운다. 특히 엇모리장단의 곡선적이고 입체적인 한삼 놀림은 양반의 거드름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한편, 소박하고 정겨운 인간미를 표현한다. 다음 올림채 장단에서는 춤이 급전환되어 밟이춤으로 강인함을 표현한다. 몰아치는 장단에 섬세한 발 놀음으로 춤은 엄격함과 유연함을 교차하여 지면을 밟아 나간다. 겹마치기-자진굿거리장단의 춤은 화합과 조화를 표현한다. 엇박의 묘미와 비대칭적인 절름거리는 걸음을 반복하며 감성적인 해학을 드러낸다. 익살스러운 고갯짓과 발짓이 결합된 유쾌한 동작으로 춤이 마무리된다. 이동안류 태평무는 힘 있는 회전과 어우러진 한삼춤으로 입체적인 공간감을 형성한다. 점차 도약하는 춤과 원무(圓舞)의 구성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백성[관객]과 혼연일체 된 교감으로 신명의 여운(餘韻)을 남긴다. ○ 주요 춤사위 강선영류 태평무는 전반부에 한삼을 끼고 춤추다가, 후반부에 겉옷인 원삼과 한삼을 벗고 춤을 춘다. 일자펴기[평사위], 뿌림사위, 끼고 감는 사위, 제치는 사위, 끼고 드는 사위, 감는사위, 들사위, 올릴사위, 끼는 사위 등의 춤사위로 유려한 한삼의 곡선적 흐름을 생성한다. 한삼을 벗고 추는 후반부의 춤은 간결하고 순발력이 요구되는 회전(回轉) 춤이 많다. 평사위, 엎는 사위, 여미는 사위, 엇거는 사위, 감고 푸는 사위, 손목 돌림사위, 휘젓는 사위, 헤엄치는 사위, 내릴사위 등 상체 중심의 춤사위가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발동작으로는 치마를 잡아 걷어 올려 다양한 발짓을 선보인다. 발로 원을 그리는 독창적인 원 돌림 걸음을 비롯한 겹걸음, 따라붙이는 걸음, 잔걸음, 큰 폭으로 들어 걷기, 뒷걸음 찍기, 앞꿈치 찍고 뒷꿈치 디딤, 뒤꿈치 찍어 들기, 빙글돌기, 무릎 들어 돌기, 빠른 걸음, 발 옆으로 밀어 딛기, 발 옆으로 옮겨 딛기, 엇붙여 딛기 등의 발놀림이 강함과 부드러움[강유(剛柔)]의 결합으로 흥과 신명을 불러일으킨다. 한영숙류의 태평무는 춤의 무절이 간결하고 담백하며, 좌우 대칭을 이루는 구성으로 안정감을 준다. 상지의 춤사위는 겹사위, 치고 드는 사위, 펴는사위, 내릴사위 여미는사위, 휘젓는사위, 모으는사위, 드는사위, 손목놀음, 좌우세 등이 있다. 발사위로는 겹디딤과 같이 부드러움과 명확함이 결합된 보법을 비롯하여 빙글돌기, 오금죽이는사위, 게걸음[옆으로 따라붙이는 사위], 발들기, 뒷걸음, 방아사위, 깨금발디기, 뒷꿈치찍기, 잔걸음, 엇붙여 빙글돌기 등이 있다. 춤사위는 다양한 발놀림이 절제된 자태와 결합하여 정제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주로 좌우의 대칭적인 구성을 통해 간결한 무절이 반복되어 신명을 돋운다. 이동안류의 태평무는 강선영류나 한영숙류의 태평무와 달리 남성이 추는 춤이다. 장단의 변화에 따라 회무(回舞)나 회전(回轉)을 통해 정확한 맺음과 전환을 보인다. 원님 복식을 입고 손에는 한삼을, 발에는 목화(木靴)를 착용하여 춤추므로 발디딤의 공간 변화가 크다. 한삼을 끼고 춤추는 상지의 춤사위는 뿌리는 사위, 감는 사위, 놓는 사위, 푸는 사위, 감고 푸는 사위, 얹는 사위, 젖히는 사위, 허리 짚는 사위, 끼는 사위, 모으는 사위, 휘젖는 사위 등의 춤사위가 있다. 하지의 발디딤은 성큼걸음, 발 드는 사위, 공 그리는 사위, 완자거리 가락, 엇붙임 걸음, 깨끔 걸음, 뛰는 걸음, 차는 걸음, 열가락, 빙글도는 걸음 등 모듬발 뛰기, 구르기 사위, 방아사위 등이 있다.
태평무는 경기도 남부굿의 무악(巫樂)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여, 세 유파의 태평무 반주 장단은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다. 장단은 균일(均一) 박이 아니라 혼합(混合) 박의 양상을 띤다. 2소박(小拍)ㆍ3소박의 결합 구조로 구성된 5박, 10박, 15박 등은 민속춤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박자의 구조이다. 따라서 춤은 엇박을 사용하는 비대칭적인 매력을 보이게 된다. 이 비대칭적인 장단 구조와 맥을 같이하듯 장구의 채편 타법이 두드러진다. 강선영류 태평무 반주에는 다른 유파와 달리 터벌림장단이 수미쌍관의 방식으로 전ㆍ후에 구성되어 있다. 행진에 사용하는 낙궁 장단으로 시작하여 터벌림-터벌림몰이-올림채-올림채몰이-넘김채-발뻐드레-도살풀이-도살풀이몰이-터벌림장단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영숙류 태평무는 푸살-터벌림-봉등채의 장단으로 연주하는 가야금 독주곡 〈새가락별곡〉으로 시작하여 터벌림-올림채-올림채몰이-넘김채-천둥채-겹마치기-발뻐드레-도살풀이-도살풀이모리-발뻐드레-자진굿거리-터벌림장단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동안류 태평무는 낙궁 장단으로 시작하여 부정놀이-터벌림-터벌림몰이-엇중모리-올림채-올림채몰이-겹마치기-자진굿거리장단으로 진행된다.
한성준에서 비롯된 강선영류와 한영숙류 태평무는 왕과 왕비의 복식을 착용한다. 한성준은 일제강점에 따른 시대적 제약에 따라 신라시대 왕의 복식을 착용하였다.
훗날 “나중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면 조선의 왕과 왕비 의상을 제대로 갖추어 입고 춤을 춤추라”는 한성준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복식(服飾)을 복원하였다. 강선영류 태평무는 왕비의 예복인 흰색 원삼(圓衫)을 입고 오색한삼을 양손에 끼고 한삼춤을 추다가 탈복(脫服)한 후 치마 위에 당의(唐衣)만을 입고 간결하게 춤을 춘다. 치마는 남색 위에 홍색을 겹쳐 입고, 치마의 하단에는 금박을 박아 장식한다. 녹색의 당의에는 수를 놓고 간혹 노리개를 착용하여 장식하기도 한다. 머리는 궁중의 예식용 어여머리에 떨잠을 꽂아 장식하고, 어여머리 뒤에는 금박을 박아 장식한 댕기를 길게 늘인다. 발에는 버선을 신는다. 왕의 복식은 집무 시에 입던 황색 곤룡포(袞龍袍) 위에 옥대(玉帶)를 착용하고 머리에는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흰색 한삼을 손에 끼고 한삼춤을 춘다. 곤룡포와 한삼을 벗은 후에는 흰색 바지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흰색 도포, 흰색이나 노란색 전복에 술띠를 착용하고 머리에는 상투관을 쓴다. 발에는 버선을 신거나 간혹 혁화(革靴)를 신기도 한다. 한영숙류의 태평무는 욍비의 예복인 원삼을 착용한 강성영류와는 달리 왕비의 평상복인 스란치마에 당의를 갖추어 입는다. 한때 춘앵전 복식과 같은 노란 앵삼을 입고 한삼을 착용하고 머리에 족두리를 쓰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앵삼과 한삼을 착용하지 않는다. 치마는 홍색 치마에 단을 댄 남색 스란치마를 입고 그 위에 금박을 박아 장식하나 최근에는 두 색의 치마를 안팎으로 착용하기도 한다. 머리는 쪽을 지어 용잠(龍簪)을 하고 족두리를 쓴다. 발에는 버선을 신는다. 이동안(李東安)류 태평무는 왕비의 복식을 갖추고 춤을 추는 강선영류나 한영숙류의 태평무와는 달리 남성의 관복(冠服)인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착용한다.
흰색 바지저고리 위에 남색 단령[조복(朝服)]을 입고 허리에는 붉은색 각대를 하고 머리에는 사모(紗帽)를 쓴다. 손에는 흰색 한삼에 붉은 끝단을 달아 액을 몰아내는 춤의 주술적 행위를 보완한다. 발에는 목화를 착용한다.
태평무는 굿의 미학이 무대 미학으로 전환된 춤으로, 승무, 살풀이춤과 더불어 민속춤의 백미로 꼽힌다. 전국적인 전승 양상을 보이는 승무나 살풀이춤과는 달리 경기ㆍ서울지역에서만 전승되는 춤 종목 중 하나이다. 경기ㆍ서울지역에서 활동하던 재인 광대들이 집대성하여 무대 양식화한 춤으로서 예술성이 높다. 재인 광대들은 전통예술의 근간이 되는 무속 현장에서 의례 및 가무악희(歌舞樂戱)를 익혀왔고, 전문적인 연행 현장에서 줄타기 등의 기예와 재담, 춤, 소리[노래] 등을 연행해 왔다. 그리고 근대 문화의 접경지역에서 전통예술의 근대화 작업을 주도하며 새로운 연행문화를 만들어 왔다. 태평무는 시대를 앞서 연행문화를 주도한 재인 광대들이 흥행을 전제로 양식화하여 매우 독창적인 예술성을 보인다. 춤은 미학적 질서를 통해 춤의 내용과 상징이 명확하게 양식화 되어 전통춤 재구성의 본(本)이 되고 있다. 또한 춤사위도 오래된 고형(古型)으로서 가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춤의 기교는 줄타기에서 비롯된 역학적 구성원리를 반영하여 기방 계통 춤이 갖는 정형성과는 달리 매우 즉흥적이고 역동적이다. 태평무는 우리 춤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이해하는 귀중한 문화자산으로서 전승의 가치를 갖는다.
국가무형문화재(1988)
강선영(성기숙 기록), 『태평무 인간문화재 강선영』, 연낙제, 2008. 국립문화재연구소, 『태평무(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5)』, 국립문화재연구소, 1997. 문화재관리국(정병호ㆍ최현), 『태평무와 발탈』,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제149호, 1982. 문화재관리국(정병호), 『태평무』,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181호, 문화재관리국, 1988. 강인숙ㆍ최효정, 「국가무형문화재 한영숙류 태평무의 바람직한 발전방향 모색」,『지식과 교향』8, 2021 김기화. 「이동안의 작품에 투영된 무속세계관」,『대한문용학회논문집』73/1, 2014.
김기화(金起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