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가락, 산조(酸調), 심방곡(心方曲), 봉장취
19세기 중·후반에 등장하여 여러 단계의 양식적인 변화를 거쳐 오늘날까지 연주되고 있는 기악 독주 갈래
산조에 대한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금옥총부(金玉叢部)』(1885)에 보이는 〈심방곡(心方曲)〉이다. 이후로 심방곡이라는 명칭은 〈허튼가락〉이나 〈봉장취〉 등등과 함께 산조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산조(酸調)라는 용어는 『조선아악(朝鮮雅樂)』이라는 문서철에 묶여 있는 1913년 기사에 처음 보이고1925년 이후에야 비로소 한글로 “산조” 혹은 한자로 “散調”라 쓴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5년 이후로도 상당 기간 동안 산조라는 용어는 이 갈래를 지칭하는 단일한 명사로 정착되지 못했고, 여전히 〈심방곡〉,〈봉장취〉와 함께 사용되거나, 혹은 “독주”나 “기악” 심지어 “민요”라 분류되기도 했다. 산조가 특정 기악 독주 갈래를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해방 이후였다. 함화진(咸和鎭, 1884~1948)은 『조선음악통론』(1948)에서 산조를 현재와 같은 기악 독주 갈래로 지목했고, 또 1950년대 후반부터 각 대학의 국악과에서 산조를 국악 실기 종목 중에서 가장 주요한 레퍼토리로 삼게 되었으며, 1968년부터 국가는 산조를 중요무형문화재 중 하나로 지정하면서 산조는 현재와 같은 단일한 용어와 개념으로 제도권 사회 내에 안착했다.
○ 역사적 변천 과정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는 급격한 사회적 변동이 일어났던 때였다. 산조는 바로 이 시기에 지역의 기악 명인들에 의해 발생하여 급속도로 변화·발전했다. 비록 지역별 음악 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각 악기별 산조의 발생 시기는 연대기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러나 발달 단계별로 이루어졌던 음악적 성취, 즉 음악 구조나 향유 양태 그리고 제도권 음악계와의 관계 등등은 서로 유사하다. 따라서 산조사는 크게 세 단계, 즉 “초기 산조(발생과 전개 시기)-발전기 산조(경쟁적 구전심수(口傳心授) 시기)-현대 산조(악보를 통한 연주와 재해석 시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그간 산조의 발생에 대해서는 대체로 1920~1930년대에 활동했던 음악가들의 구술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설로, 즉 시나위 발생설, 봉장취 발생설, 판소리 발생설로 설명되어왔다. 시나위 발생설은 함화진이 『조선음악통론』에서 산조의 발생에 기여한 음악 갈래를 〈심방곡(心方曲)〉으로 적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함화진 이후로 〈심방곡〉은 시나위와 동일시되었으나, 정작 시나위의 정체에 대해서 여러 기악명인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았다. 이들은 시나위를 무속 시나위라거나, 공연용 시나위 합주 등등으로 서로 다르게 구술했다. 한편, 〈봉장취〉 발생설은 김윤덕(金允德, 1918~1978) 등과 같은 기악 명인의 진술을 토대로 이보형(李輔亨) 및 황병기(黃秉冀, 1936~2018) 등이 제시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특히 이보형은 신재효(申在孝, 1812~1884)의 <변강쇠가>에서 관련 단서를 찾아내기도 했지만 그는 시나위 발생설 외에도 판소리 발생설을 제시함으로써 산조가 시나위로부터 직선적으로 발전했다는 논리와 거리를 둔 바 있다. 한편, 판소리 발생설은 판소리 명인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백대웅(白大雄, 1943~2011), 이보형 등이 판소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제기한 것이다. 산조와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장단과 조성이 서로 유사하고, 또, 역사적으로 판소리가 산조보다 선행했기 때문에 판소리로부터 산조가 발생했다고 추론한 것이다. 그런데 산조는 발전 과정에서 주변의 여러 음악 갈래와 관련을 맺었는데, 이때 판소리보다 여타 기악 갈래와 더 밀접하게 소통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판소리 발생설이 제기될 무렵에 고려되지 않았다. 최근, 구술에 의한 산조 발생설은 문헌이나 사료 등을 통해,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에 기록된 문헌과, 또 1912년 이후로 녹음된 음원들의 분석 결과를 통해 수정·보완되었다. 이에 따르면 시나위 발생설에서 거론되었던 시나위는 무속 시나위가 아니라 늦어도 19세기 후반에 무속 현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으로 연주되었던 기악 심방곡임이 밝혀졌다. 안민영(安玟英, 1816~1885)의 『금옥총부』에 등장하는 가야금 및 편시조(編時調)의 명인 최치학(崔致學)이 풍류방에서 연주했던 〈심방곡〉, 그리고 당시 경기도 이천에 사는 퉁소 명인 김군식(金君植)이 연주했던 〈심방곡〉 등이 산조의 초기 형태라는 점이 주목되었다. 한편, 음악 전문 집단의 활동상과 음악의 구조 분석(musical analysis)을 통해 산조사에 기여한 〈봉장취〉는 연희 봉장취가 아니라 연희로부터 독립한 기악 봉장취였음도 밝혀졌다. 기악 봉장취는 독주 심방곡과 별도로 발생했고, 양자는 서로 경쟁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기악 봉장취를 연주하던 풍각쟁이 집단이 근대 이후로 급격히 몰락하면서 독주 심방곡을 계승했던 집단, 즉 창우집단 중 고인[工人]의 계승자들이 봉장취 집단의 음악 논리와 향유 공간을 취하게 되면서 기악 봉장취는 산조 발전에 관여하지 않았게 되었다. 한편, 남도음악에의 주도권이 판소리계에 있었을 때 제기되었던 판소리 발생설, 즉 판소리가 기악화된 것이 산조라는 주장은 아직 그 논리적 공백이 채워지지 않고 있다. 이상과 같이 초기 산조는 최소한 경기도 이천 이남 지역에서 발생했고, 지역별로 혹은 해당 음악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던 음악 집단별로 그 명칭을 〈심방곡〉,〈봉장취〉 등으로 달리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산조는 독립적인 기악 갈래로서의 기본 구조, 즉 몇 개의 서로 다른 장단으로 된 악장을 연속시켜 하나의 악곡을 이루는 점, 또 조성의 논리로써 선율을 운용하는 점, 그리고 특정 악기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전개되는 점 등은 일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조 발생기가 마무리될 즈음에 이른바 산조의 중시조라고 지목되는 명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지역 음악을 바탕으로 개성적인 산조를 제시했다. 이들 중시조의 면면은 김창조(金昌祖, 1865~1919), 한숙구, 유성천, 박한용, 이영채, 박학순, 박팔괘(朴八卦), 심정순(沈正淳), 백낙준(白樂俊, 1876~1930), 김덕진, 지용구(池龍九, 1857∼1938), 유피리, 김경선(金慶善) 등등인데, 이들을 통해 산조는 발생기에서 발전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특정 단일 악기에 대한 산조만 만든 것은 아니었고 여러 악기를 위한 산조를 두루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악기별 산조는 같은 속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즉, 거문고, 해금, 퉁소, 대금, 단소 등등의 산조는 가야금 산조가 등장하던 시기에 동시적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발전의 속도는 가야금산조 보대 약 한 세대 정도 뒤졌다. 왜냐하면 산조의 중시조들이 활동하던 만년에는 지역 음악계 외에도 여러 지역의 음악을 통합하여 수용해내는 도시적·근대적인 음악계가 탄생했는데, 이 공간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던 산조는 가야금산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야금산조는 여타 악기의 산조보다 앞서 발전하면서 산조의 양식적 가능성을 다양하게 모색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산조 갈래의 전반적인 발전을 견인할 수 있게 되었다. 산조의 중시조가 등장한 이후부터 산조는 더욱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특정 중시조로부터 시작되는 도제적 사승 관계가 구성되면서 산조는 유파(流波)를 형성하며 계통적으로 전승되었다. 이러한 전승 체계는 주로 창우 집단의 고인 음악을 계승한 음악가들에 의해 정밀해졌다. 또한 이들은 한반도의 남도 끝에서부터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활동했기 때문에 산조는 전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관된 논리를 갖춘 긴 기악 독주 음악으로서 정착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창우집단의 후예들은 봉장취 집단과 달리 산조 갈래에 대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발전기의 산조는 구전심수 방식으로 전승되면서 지역에 따라서 다소 폐쇄적인 사승 관계 속에서 전승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대도시에는 산조 명인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도제적 사승관계로부터 벗어난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13년에 대구 출신 설경패(薛瓊貝)는 덕수궁에서 가야금으로 산조(酸調)를 연주했고 충청도 출신의 박팔괘와 심정순 등은 1910년대 전반기부터 서울의 여러 극장에 공연하고 산조를 연주했다.
이처럼 산조 중시조의 다음 세대의 음악가들은 공적 공간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기존 산조들 간의 음악적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통합하거나 재해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발전기의 산조는 발생기 산조에서 보여주었던 특징, 즉, 개인이나 개개 지역별 특성이 산조에 반영되는 현상을 일정 부분 소거하고 통합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를 보여주며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음악 어법과 전승 계보상에서 보이는 차이는 한동안 두 권역의 산조로, 즉 “경기-충청” 산조와 “경상-전라” 산조라는 두 계통으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였다.
“경기-충청” 산조는 2소박 장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양상을 보였고, 또 굿거리나 당악 같은 경기 무속 장단을 산조에 적용했으며, 장단 리듬의 변화를 다채롭게 만들었고, 또 초절의 기교를 요구하는 빠른 악장, 예를 들면 당악(단모리 혹은 세산조시)을 산조 내에 도입하여 안착시켰다. 한편, “전라-경상” 산조는 3소박이 산조를 관통하도록 했고, 또 계면조에서의 청이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구조화했으며, 또 음악의 논리적 일관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가야금산조의 진양에서, 조성의 변화와 청의 이동을 통합적으로 통제하는 정밀한 구조, 즉 “우조→돌장→평조→계면조”(약칭 “우돌평계”)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음악가들은 김해선, 심상건, 정남희(丁南希, 1905~1988), 강태홍(姜太弘, 1893~1957), 김삼태, 한성기, 김운선, 박종기(朴鍾基, 1879~1941), 강백천(姜白川, 1898~1982), 전용선(全用先, 1888~1965), 김태문(1893~1980년대), 김종기(1902~1937)와 신쾌동(申快童, 1907~1978), 박석기(1899~1953), 한갑득(韓甲得, 1919~1987), 류대복(1907~1965), 지영희(池瑛熙, 1909~1980), 한주환(韓周煥, 1904~1966), 한범수(韓範洙, 1911~1984), 편재준( 1913~1976), 이충선(李忠善, 1901~1989) 등이었다. 이들에 의해 가야금, 거문고, 해금, 대금, 피리 산조 등은 대략 1950년대 전후에 음악 구조적 완성이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박성옥(1908~1983)은 1950년대 전후에야 비로소 아쟁 산조의 원형적 모습을 제시했고, 정철호(1927~2021), 한일섭(1929~1973), 장월중선 (張月中仙, 1925~1998) 등이 이를 보다 세련되게 만들었다. 한편, 양금 산조, 태평소 산조, 철현금 산조 등등도 대략 1960~70년대 이후에는 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각 악기별 산조가 양식적으로 안정된 단계에 도달했을 무렵부터 산조에서는 기악 봉장취로부터 비롯된 음악적 특징들, 예를 들면 새소리를 모방한 선율로 단락을 구성하는 등등의 특징은 사라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산조가 발전하면서 제시한 음악 논리와 그로부터 비롯된 산조의 미(美)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일이 벌어질 무렵 전후로 상당기간 동안 한국 사회는 전후 복구라는 역사적 과제와 일방적 서구화라는 열풍 속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전통음악인들의 창조적 활동도 지극히 위축되었다. 따라서 해방 전까지 제시되었던 산조의 창조적 가능성은 고르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전라-경상'계 산조 가운데 특정 전남계 산조들은 전라도 출신 음악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할 수 있었지만, '경기-충청' 산조는 심상건 사후에 전승이 끊기게 되었고, 또, 도시적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던 전북제 산조와 몇몇 전라-경상계 산조들은 전승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
발전기의 산조만 하더라도 산조의 고유한 양식적 규범이 지켜지는 한에서 일부 선율은 즉흥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즉흥은 산조의 연주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음악적 생동감을 높이게끔 기능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전심수 방식으로 전수될 때 생기는 한계, 즉 기억의 한계를 창조적으로 보완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로 산조는 악보를 통해 학습하게 되면서 구전심수와 밀접하게 연계된 즉흥성 역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현재 확인되는 바에 의하면, 1958년 이후로 남북한 모두 산조를 악보로 접근했다. 예를 들면, 남한에서는 전재완(全載完)이 정간보 육보(肉譜)로, 그리고 김희조(金熙祚)가 오선보로 산조를 제시했고, 또 북한에서는 정남희와 안기옥이 오선보로 산조를 출판했다.
산조에의 접근이 악보를 통해 이루어질 무렵부터 산조사에서는 주목될만한 다른 변화도 연이어 나타났다. 예를 들면, 1968년부터 국가는 산조를 무형의 유산으로 지정했는데, 그러면서 산조는 사회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보여줘야 하는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전승과 보존을 문제 삼아야 할 무형의 자산으로 간주 되었다. 또한 1980년대부터 악보로 산조를 배운 음악가들의 수가 구전심수했던 음악가들보다 월등히 많아지면서, 국악계 내에서는 악보에 기록된 산조를 고도의 기교로 연주해내는 일이 더 중시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는 산조가 기존의 산조 형성 논리에 따라 더 발전하는 것을 사실상 차단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온전히 산조를 연주만 하는 음악가들 간의 경쟁을 촉발하면서 산조의 연주 기교는 전보다 치밀해졌다. 뿐만 아니라 산조를 연주하는 악기들도 무대 공연에 더욱 적합한 상태로 개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방식으로 산조를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산조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재해석이란 근대적 작곡 행위를 통해 산조에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1950년대부터 작곡가들은 산조의 악보와 연주를 보고 산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나운영(羅運榮, 1922~1993)은 산조의 연속체적 전개 방식을 수용하되 이를 재해석하여 <바이올린과 피아노 2중주를 위한 산조>(1955)를 발표했고, 김희조는 성금련 산조를 기반으로 <가야금 산조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58)을 내놓기도 했다. 이후로도 수많은 작곡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산조를 재해석했다. 예를 들면 황병기, 이해식(1943~2020), 윤혜진, 김국진, 유병은, 이영조 등등은 물론이고, 최근 김택수는 서양식 관현악곡으로 산조에 접근하여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계에서도 락 기타리스트 신중현, 김도균 등이 기타 산조를 제시했고, 최근 함춘호는 기타 산조 협주곡에 도전하기도 했다.
현대 산조에서 보이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산조의 미적 특질을 보여주는 미분음이 악보에 기보되는 순간 왜곡되었다고 하기도 했고, 또 산조사가 개척해왔던 창조적 변화를 외면하고 연주 중심의 산조가 되고 말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조사는 발생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변했고, 또 변화의 단계별로 추구했던 목표와 성취된 결과도 서로 달랐다. 따라서 과거의 산조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산조를 평가할 수는 없고, 그 변화를 이해하고 또 다른 변화를 만들게끔 유도하는 일이 남았다 할 것이다.
산조란 순 기악으로 된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 논리의 전개만으로 악곡의 변화와 음악적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에 산조 명인들은 오랜기간 동안 단계적으로 다음과 같은 산조의 음악 논리를 만들어 갔다. 첫째, 특정 장단을 바탕으로 한 개의 악장을 구성하고 이러한 악장을 여러 개, 즉 느린 악장으로부터 빠른 악장까지 연속시켜 그것을 단일한 논리로 통제할 수 있는 연속체로 만들었다. 둘째, 이 연속체의 세부를 변화무쌍하게 전개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즉 조성 논리와 장단 리듬의 논리를 변화시켰다. 예를 들면, 계면조 조성을 기본으로 삼되 기본이 되는 청(주음)의 2도, 5도, 4도, 3도 위로 옮겨 다니도록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면조와 대립되는 조성 즉, 평조를 추가하여 조성 간의 경쟁을 유도했다. 또한 관례적으로 유지되는 장단 리듬의 논리를 엇붙임과 도섭을 사용하여 파괴함으로써 엑센트의 역동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셋째, 분명한 종지를 제시하여 단락과 악장을 구분하고, 넷째, 악곡 전체를 이상과 같은 일관성 있는 논리로 완결해냈다. 산조에서 관철되는 위와 같은 원칙은 음악적 긴장과 이완을 생성하게 했다. 비록 이상의 원칙들은 산조사의 발달 단계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 때문에 내드름부터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 등등에 이르는 긴 연속체에서 다채로운 음악적 변화가 논리적으로 통제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생성 원칙이 안정되게 작동했기 때문에 각 연주자별 개성도 두드러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미분음의 폭과 리듬의 강세를 연주자 별로 다르게 조절한다거나 또, 연주자별로 악기의 음색을 미묘하게 달리 표현한다거나 혹은 연주의 기교를 마음껏 과시하는 것 등등과 같은 대가적 성취(virtuocity)가 돋보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들은 당대의 작곡가들로 하여금 한국의 전통적인 기악음악의 표현력과 기교 그리고 미에 대한 정교한 이해에 도달하게 했고, 절대다수의 감상자들로 하여금 산조의 무궁무진한 매력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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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희(權度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