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대 건봉사 동화축전(東化竺典)이 창작한 4음보 율격의 한글 불교가사
권왕가는 동화축전(東化竺典)이 창작한 총 1,203구의 불교가사(佛敎歌辭)이다. 한글 가사문학의 율격인 4음보 연속체이며 한 구를 이루는 음수율은 3.4조, 4.4조가 우세하다. 동화축전의 활동 기간과 장소에 비추어 이 작품은 1851년 개최한 건봉사의 만일염불회와 관련하여 창작하였거나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작품은 1908년 범어사에서 목판으로 인쇄되어 대중에게 확산되었고, 무속에서 독경무의 독송대본으로도 활용되었다. 1935년에는 불교의례서 『석문의범』에 수록되었고, 해방 이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화청』 (1965)에 수록되었다. 불교 의식에서 필요에 따라 목탁을 치면서 구송하는 독송 대본으로 전승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은 염불에 관한 기존의 지식, 법문을 총괄하여 가사화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간행된 여러 염불서와 비교할 때 가장 다양한 항목과 내용을 담고 있다. 문학적 측면에서는 조선 민중 내적 생활의 보배로운 기록으로서, 조선 민중의 외적 생활을 기록한 〈농가월령가〉에 비교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권왕가는 1850년대 초 건봉사 만일염불회의 개최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동화축전이 창작한 불교가사이다. 처음에는 필사 전승되다가 범어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권왕문』(1908)에 작가명 없이 불교가사 〈서왕가〉,〈자책가〉와 함께 순한글로 실려 널리 알려졌다. 분량은 1,203구의 장편 가사로 불교가사 가운데 가장 긴 작품이다.(『권왕문』본 기준. 손진태 채록본은 1,197구, 『석문의범』본 1,198구) 다른 불교가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구는 3.4조 혹은 4.4조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전구·후구로 구성된 한 행은 4음보 율격을 지닌다.
이후 근대 잡지인 『조선불교월보』 17~18호(1912)에 ‘동화츅전 유져’라는 이름으로 1~204구까지 소개되었고, 『불교』 89~90호(1931)에는 손진태가 채록한 부산 동래 구포리의 맹인 독경무 최순도 소장 필사본이 수록되었다.(〈조선불교의 국민문학-불교도의 냄긴 왕생문학〉). 손진태가 소개한 권왕가는 불교가사(화청)가 무속 가사로 전용되는 한 사례를 보여준다. 이후 근대의 대표적인 불교의식집인 『석문의범』(1935) 「가곡」편에 ‘동화축전(건봉사)’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석문의범』 「가곡」편에는 〈참선곡〉〈회심곡〉 등 20종의 가사, 창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통의식이나 근대에 새로 제정한 의식에서 구연하는 가요의 모음집 성격을 지닌다. 이후 권왕가는 원불교(불법연구회)에서 펴낸 『회보』 64~65호(1940)에도 수록되었고, 해방 이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화청』(1965)에 화청의 대본으로 소개되었다.
동화축전은 1825년경 출생하여 1854년경 입적한 승려로 활동공간은 금강산 정양사, 건봉사이다. 건봉사 기록을 보면 그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아들을 위해 연 추모불사를 주관하였고, 1851년에 개최한 건봉사 만일염불회를 개최한 주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건봉사는 신라 만일염불회의 전통을 이어 1802년에 제2회 만일염불회를, 1851년에 제3회 만일염불회를 개최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1851년의 만일염불회는 벽오유총(碧梧侑聰), 영암취학(靈巖就學), 동화축전이 함께 개최하였으나 영암과 동화가 일찍 입적하여 벽오유총이 주관하였다고 한다. 작품을 학계에 보고하고 최초로 문학적 평가를 내린 이는 손진태다. 그는 권왕가가 조선 민중의 종교적 환희상을 펼쳐 보이는 진귀한 작품으로서, ‘조선 민중의 외적 생활의 지보적(至寶的) 기록’인 〈농가월령가〉에 필적하는 ‘내적 생활의 지보적 기록’으로 평가하였다. 또 작자에 대해서는 유심정토, 자성미타라는 심원한 학설을 여러 경전을 거리낌 없이 인용하여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식계급에 속한 불도로 추정하였다. 이후 김종진은 동화축전이 봉은사의 남호영기가 간행한 『불설아미타경요해』(삼각산 내원암, 1853)와 쌍월성활이 간행한 『유마힐소설경』(철원 성주암, 1854) 에 쓴 서문을 통해 그가 1850년대 전후로 추사의 영향을 받아 전개한 한강 이북 승려들의 불서판각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밝히고, 권왕가 역시 그의 교학적 연구 수준과 범위를 충실히 담아낸 불교가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권왕가는 극락왕생을 권장한다는 노래 제목처럼 왕생을 위해 생전에 닦아야 할 염불을 권장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권왕가는 조선시대에 염불법문으로 소개된 여러 선행 항목을 모두 담고 있어 방대한 분량이 되었다. 권왕가의 핵심적인 부분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으로 알려진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주로 극락의 장엄한 광경, 법장비구의 본행사, 염불왕생을 가능하게 하는 공덕, 구품왕생의 여러 단계 등이 소개되었다. 이외에 권왕가는 기존의 염불법문에서 염불수행의 요건으로 제시된 신원행(信願行) 가운데 신과 행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 극락왕생을 권하는 정토법문에 대한 비판은 불교의 전통적인 논쟁 중의 하나이다. 권왕가에서는 ‘내마음이 극락이요 내자성이 미타’라 하면서 염불하여 정토왕생하자는 주장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중국 왕일휴의 『용서정토문』의 내용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이다. 권왕가에는 임종시에 가져야 할 신불인들의 마음 다짐과 행동이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염불권장서인 『보권염불문(염불보권문)』에는 선도화상의 「임종정념문」이 「임종점념결」이라는 제목으로 한글로 소개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임종시에 울거나 소리를 내어 나의 정념을 잃지 말고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염불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이외에 염불권장서에 실려 전하는 왕생인들의 이야기 역시 권왕가에 길게 수록되어 있다. 중국의 왕생전인 『왕생집』, 『예념미타도량참법』을 비롯 조선전기의 『권념요록』, 조선후기의 『보권염불문』, 『정토보서』 등에 소개된 왕생인 중 대표적인 인물을 소개하면서 의상법사와 건봉사 아간비자의 왕생담을 추가하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삼계가 화택이요 사생이 고해로다’로 시작하여 ‘법성토 너른 땅에 임운등등 등등임운 무위진락 수용하세.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로 마무리하는 권왕가는 창작 시기와 작자의 활동공간을 고려해 보면 1851년 건봉사에서 만일염불회를 개최하면서 강경과 독송의 대본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매일 같이 모여 염불을 높이 소리 내어 부르면서 일정 시간에 권왕가를 목탁을 치며 구송했을 가능성이 크다. 1908년 범어사에서 권왕가를 판각한 것도 범어사 만일염불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손진태가 동래 구포에서 채록한 권왕가는 무격 박순호가 구연의 대본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자료다. 권왕가가 불교의 염불신앙을 홍포하는 의식에서 구송되어 오다가 독경무의 의식 가요로도 활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사찰에서 독송의 대본(화청)으로 독송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분석한 내용을 종합하면 권왕가는 극락정토와 염불권장 담론을 펼친 우리말 노래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이며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이다. 기존의 한글 염불권장서에 비해서도 내용이 방대하고 주제의 폭이 넓어 한글염불서의 결정판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이 작품을 통해 19세기 조선불교계의 염불에 대한 교학적 탐구의 편폭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다양한 한문 경론을 한글 가요로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문화번역의 산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손진태, 「조선불교의 국민문학」, 『불교』 90, 1931.12. 김종진, 「권왕가의 선행담론연구」, 『불교어문논집』 8, 한국불교어문학회, 2003. 김종진, 「동화축전론」, 『한국어문학연구』 41,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03.
김종진(金鍾眞)